자유게시판

 번호: 293 작성일시: 2009-06-16 11:14:28 (61.75.39.181)
제목    예천 출신 정치인 안희대씨의 의문사 10년
이름    수학맨 조회 : 5760  

지난밤 문득 안희대씨가 혹시 의문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에서 기사를 찾아보았다.

역시 의문사가 맞다.

비록 10년 전이기는 하지만 이런 일은 아직까지도 일어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의문사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2008-09-09 오전 10:07:25 입력 뉴스 > 예천인터넷뉴스

예천군 용궁면 월오리 출신 정치인 안희대씨의 의문사 10년 !



안희대 라는 이름이 이 세상으로부터 사라진지 벌써 10년이 흘렀다. 살아서 크게 이름을 알린 사람도 아니고 남보다 나이가 많았던 사람도 아니다.


1952년생이니까 우리식으로 나이를 계산하면 올해로 쉰일곱이 된다. 굳이 십이간지(十二干支)로 따지면 용띠다. 그런 그가 10년 전에 숨을 거뒀다. 50도 되지 않은 나이니 한참 젊은 나이 아닌가. 그런데 그가 죽은 후 문제가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그가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은 '8년 10월9일 아침이다. 하필이면 세종대왕이 백성이 쓰고 읽기 쉽도록 한글을 반포한 날이다. 여의도 노들길에서다. 변사체의 상태는 한눈에 보더라도 타살이 분명했다.


손발이 묶여있는데다가 눈썹 위의 머리를 가격한 흔적이 완연했다. 경찰은 즉시 영등포 시립병원으로 옮긴 다음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부검을 실시했다. 부검은 국과수의 베테랑들이 담당했다.


타살이 분명하다는 결론이었다. 수사본부가 구성되어 범인 색출에 나섰다. 그러나 수사결과는 1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 한마디로 영구미제 사건이 된 셈이다. 일반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어려운 사건도 아니듯 싶다. 더구나 타살로 추정되는 검시결과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초동수사 당시 무엇을 했기에 아직까지도 깜깜 무소식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안희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기에 비명에 가고서도 그 원인을 남기지 못했을까. 그의 살아온 길을 잠시 살펴보자. 그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용궁중학을 나와 서울 용산고를 다녔다.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과 동기생이다. `73년도에 고려대 정외과에 입학했으나 곧 이은 긴급조치9호를 위반하여 제적과 함께 구속된다. 교도소에서도 치열한 옥중투쟁으로 유신반대의 선명한 기치를 들었다.


10.26 이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학원자율화추진위원장을 맡아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데 앞장선다. 그러나 그 운동은 길지 못했다. 신군부가 정치에 개입하면서 5.18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안희대는 즉각 구속된다. 석방 후 해인사 성철스님을 찾아 일시 출가하기도 하는 기구한 삶을 산다. 남보다 과묵하고 예민했던 그는 감옥에서의 깊은 성찰을 통하여 속세를 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개혁을 외치는 젊은이가 산사에서만 죽치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환속하여 민청련 사무국장, 서울 민통련 집행위원장을 하다가 `86년에는 5.3 인천민중항쟁사건으로 수배된다. 당시 사회는 전두환 정권 말기를 맞이하여 민추협을 비롯한 정치권과 학생운동 권에서는 직선제 개헌운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다.


’87년 6.10항쟁은 그 백미가 된다. 6.29 항복 선언을 받아냈다. 학생운동의 중추였던 안희대는 전민련 조직국장과 민연추 조직국장을 연이어 역임하면서 이 나라 민주화운동에 박차를 가한다. 6.29관련 시위로 구속된 전력으로 국민연합 집행위원을 맡는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나 운동권으로만 머물 수 없다는 현실적인 여건이 그로 하여금 정치일선에 가담하게 만들었다.


그는 3당 야합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소수 야당을 선택한 이기택 진영에 합류한다. 이부영, 노무현, 박계동, 이해찬 등과 민주개혁정치모임의 상임이사로 참여하는 것이다. 그 후 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정치담당 특별보좌역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인의 자질을 십분 발휘한다.


그가 고향인 예천에서 14대 총선에 출마하고 보궐선거에도 입후보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신다. `96년에도 문경 예천지역구에서 재도전을 했지만 지역분열의 여파로 청운의 뜻을 접어야 했다.


위에서 주마간산으로 살펴본 삶의 일각은 그의 짧은 일생을 모두 보여준 것은 못된다. 겉으로 나타난 경력에서는 엿보기 어려운 깊은 고뇌와 성찰을 가졌던 안희대의 삶은 10년이 지난 지금도 동지들을 중심으로 추모의 모임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가 간지 이제 10년째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의 비밀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니 저 세상에 있는 고인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하고 있지 않을까.


비록 군사독재의 시절은 벗어났다고 하더라도 아직도 우리 사회는 확실하지 않은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안희대의 죽음이 영구미제가 될 만큼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범죄자들에 의해서 완전범죄로 묻힐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부모형제와 처자식들은 안희대의 의문사에 대한 의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원한을 산 사람도 아니다. 그가 평생 해온 일은 모두 정치와 관련된 일 뿐이다. 그의 행적에서 집권자를 향한 독설과 저항은 수없이 많다. 장준하를 비롯한 정치인의 의문사는 그 진상이 어둠 속에 갇혀 있다.

 

안희대의 죽음도 결국 그 전철을 밟아야 한단 말인가. 백신종 등 그의 절친한 동지들이 10주기를 기하여 추모행사를 준비한다. 이 기회를 통하여 의문사의 진상이 확연히 밝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전대열> 

 

 

 

정차모 기자(jcm5429@hanmail.net)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