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25년

고향집(95.8)
갑자기 일이 생겨 어쩔 수 없을 때, 이는 남길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되리라.

차 례
  1. 어린 시절
  2. 국민학교 - 지금은 초등학교
  3. 중학교
  4. 고등학교
  5. 대학교(현역)
  6. 군대생활
  7. 대학교(예비역)
  8. 미래

1. 어린 시절

나는 197x년 경북 예천군 하리면 송월동 그 중에서도 새마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과 누나를합해 가족은 네 명이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많이 다쳐서 부모님께 죄가 많다.

세 살 때는 쇠죽을 방금 끓인 솥에 엎어져서 화상을 입었다.
마루가 끝나는 쪽에 쇠죽솥이 있었다. 마루에서 뛰어 놀다가 솥뚜껑을 밟았는데 뚜껑이 미끄러지면서 솥에 곤두박질을 친 것이다. 다행히 왼팔을 짚으면서 넘어져서 얼굴은 화상을 입지 않았다. 어머니는 마당에서 세수를 하고 계시다가 나의 울음소리를 들으시곤 나의 웃옷을 벗기셨고, 보건소까지 3km의 거리를 업고서 뛰어 가셨다. 그때 눈물로 가득 찬 눈으로 보았던 퉁퉁 부은 팔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니는 내 화상이 완전히 나을 때까지 나를 업고 3km 거리의 보건소를 다니셨다.
아이는 누구나 그렇듯 나도 늘 어머니를 따라 다녔는데 우물이 집 바로 아래였지만 경사가 심했다. 난 오르막을 오를 때 다리가 아파서 이사를 하자고 졸랐다. 그래서 다섯 살에는 이사를 했는데(같은 동네) 이사를 할 때 나와 누나의 생가인 그 집은 헐려서 작은 밭이 되었다.

다섯 살 때, 이사간 집에서 피리를 물고 앞으로 넘어져서 입천장이 떨어진 적이 있다.
옆집 아저씨(국민학생인 7촌 아저씨)의 피리(그 당시엔 피리의 부는 부분이 요즘의 것보다 날카로운 편이었다)를 불면서 놀고 있다가 동네 친구를 발견하고는, 피리를 입에 문 채로 친구에게 뛰어가다 돌에 걸려 넘어지면서 피리에 입천장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밭에서 일을 하시던 부모님이 얼마나 놀라셨을까? 난 또 어머니와 보건소에 갔다. 시커먼 공간으로 기억된다. 시퍼런 옷을 입고 만년필 같은 것을 손에 들고는 몇 명의 사람이 나의 입을 벌리고 입천장을 꿰매는 수술을 했다. 난 또 울 수밖에 없었다. 입을 강제로 벌렸기 때문에 침을 힘들게 삼켜야만 했다. 수술이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난 흰색과 녹두 색이 있는 새 고무신을 신었고, 왼손에는 노란 들국화껌 한 통이, 오른손엔 사과가 한 개 들려 있었다. 맨발에 새 고무신을 신은 그 때의 기분은 무척 좋았다. 집에 돌아오자 동네 아이들이 내게 입을 벌려 보라고 했다. 내가 입을 벌려서 입안을 보여주면 얘들은 꿰맨 실이 보인다고 했었다.

일곱 살 때는 수수대가 팔목을 관통한 적이 있다.
추수의 계절은 매우 바쁜 때다. 저녁을 먹을 시각이 가까울 때였다. 난 혼자 계단식 논을 뛰어 내려오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뛰어 내린 곳은 작은 밭이었다. 뛴 다음에 길을 걷는데 팔에 뭔가 느낌이 있었다. 난 오른팔을 보았다. 팔둑에 수수 대가 꽂혀 있었다. 뛰어 내릴 때, 베어 놓은 수수대가 팔을 뚫으면서 부러져서 팔에 꽂혀 따라온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는 순간 질겁을 하고는 또 울면서 집으로 뛰어갔다. 어머니는 그걸 보시고는 단숨에 뽑으셨다. 일단 수건 같은 것으로 팔을 감싸고는(늦었으므로) 다음날 보건소에 갔다. 어머니는 그 때 내게 참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의사는 젓가락 같은 것으로 솜을 집어서 뚫어진 살의 양쪽을 관통해서 소독해 주셨다. 이 때는 울지 않았다. 내 눈으로 보면서도 울지 않았다. 그 날 이후로 이런 이유로 운 적은 없다. 지금도 그때 뚫렸던(두 군데) 흉터가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우리 나라 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친 날이 내 생일이었다.
여섯 살 때 담배일로 한참 바쁜 때에 여동생이 태어났고, 열 한 살 때 늦겨울 새벽에 남동생이 태어났다. 이 때부터 우리의 가족은 6명이 되는데 가족에 대한 자세한 것은 여기선 생략한다.

2. 국민학교(초등학교)

난 놀기를 정말 좋아했다.
여름에는 냇물에서 물놀이를 하느라고 물에서 살았고 겨울에는 얼음판에서 썰매를 타느라고 또 물 위에서 살았다. 학교 갔다가 돌아오면 가방을 던져 놓고는 바로 동네로 나가서 동무들과 놀기에 바빴다. 그 때는 그래도 놀 동무들이 좀 있었다. 아무튼 구슬치기, 딱지치기, 야구, 축구, 전쟁놀이 등 놀이가 끊일 날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이면 야구, 축구 등 각종 놀이를 하느라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부대끼며 밀거나 넘어뜨리는 놀이도 꽤 재밌게 했다. 놀이란 놀이는 못하는 게 없었다.
공부는 그리 즐기지 않았다. 숙제를 안 하고 아침에 일어나서 하다가 어머니께 맞기가 일쑤였다. 학교에서도 숙제 때문에 많이 맞았는데 그 중에는 억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많이 맞았다고 생각되는 선생님이 있는데 선생님들이나 선생님이 되려는 분들께는 체벌에도 정도를 두라고 부탁드리고 싶다. 특히 일기 때문에 맞는 것은 단골이었다. 일주일 밀린 일기를 기억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써야 한다는 것은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그 때의 기억 되살리는 훈련때문에 가끔 "너, 기억력도 좋다."라는 말을 듣는 것도 같다. 요즘은 안 때려도 거의 매일 일기를 쓰는데...
국민학교 2학년 때는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은 일이 있다.
학교에서 산수 시험을 칠 때였다. 나는 앞면을 다한 뒤에 뒷면으로 넘어갔다. 근데, 시험지에 인쇄된 문제가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선생님은 내가 계속 그 문제로 생각을 하자 쉬운 문제부터 풀라고 하셨다. 나는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넓게 세로로 숫자가 쓰여진 것 중 네모난 곳에 넣어야 하는 문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는데 몰두하는데 마침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선생님은 나를 주의 깊게 보셨나 보다. 선생님의 요청으로, 방과 후에 선생님을 모시고 우리 집으로 갔다. 선생님은 내가 1학년 때부터 치른 시험지를 모두 보셨다(그 때 시험지를 모두 철해 두었었다). 부모님과도 말씀을 나누셨다. 며칠후, 조회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내게 장학금 2만원을 주셨다(그 선생님은 나중에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셨고, 몇 년 후 돌아가셨다고 들었다).

6학년 때 가을에는 산수경시대회(문교부 주최 제3회 대회)에 학교 대표로 나가서 군에서 재수 좋게도 입상해서 도대회까지 나갔던 적이 있다. 촌놈이 대구까지 가니 차도 많고 정신도 없었다. 무엇보다 맛있는 것도 먹어 보아서 좋았다. 빵집에도 갔었고, 불고기도 먹었었다.

3. 중학교

은풍국민학교 학생들은 대부분 은풍중학교(400m정도 떨어진 거리)로 입학을 하는데 주위 몇 개의 다른 국민학교에서도 여기로 온다. 나는 남들보다 학교에 늦게 등교하는 편이었다. 8시 30분까지 교문에 들어서야 하는데 대부분 그 최후의 5분 이내에 등교했다.
학교에서 장난도 많이 쳤다. 3학년 때 축구를 하다가 발목을 다쳐서 체력장을 16점밖에 못 맞기도 했다. 놀이의 유행도 만들었다. 종이 비행기를 접어서 날린다거나, 탱자를 튕기며 노는 것이나, 벽에 기대어 따스한 햇살을 밭으며 밀어내기를 하는 등 재밌게 보냈다.
내게 중학교 시절 중 특별했던 두 가지는 컴퓨터를 처음으로 배운 것과 수학문제를 많이 풀어 본 것이다. 그 외에 국민학교 때보다 활동범위가 약간 넓어진 것과 좀 더 많은 친구들을 알게 된 것이다. 가치관을 나름대로 만들어 가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중3때는 학기초부터 수학선생님께서 군내 수학경시대회에 내보내기 위해서 4명에게 특별히 공부를 시키셨는데 나도 그 덕에 많은 문제를 풀어 볼 수 있었다. 드디어 군내 수학경시대회가 치러졌고, 친구 중 한 명이 1등을 했고, 나는 3등을 해서 우리학교는 종합 1등을 했다. 그렇게 해서 또 한 달 정도 뒤에는 3년만에 다시 경산중학교로 도대회 경시대회를 위해서 방문했다. 과학고 시험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1등했다는 플래카드를 보았다. 만점으로 1등을 했는데, 잘 된 일인 지도 모르지만 과학고등학교엔 떨어졌다. 아뭏든 이래 저래 많이 돌아다닌 한 해였다.

4. 고등학교

고등학교는 예천읍에 있는 대창고등학교에 갔다.
대창중학교와 대창고등학교가 같이 있다. 중학교까지는 하리면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읍까지 가야했다. 학교는 예천읍에 있었는데 거리가 16km 정도 되기 때문에 버스를 타고 통학해야 했다. 입학 성적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1년 면제가 되었다. 수학경시대회에 대한 공로 때문이다. 그 덕에 졸라서 카메라를 살 수 있었다(자동 카메라인데 10년이 거의 다 된 지금까지도 사진은 선명하게 잘 나온다).
처음엔 통학을 했으나 한 달이 좀 지났을 때부턴 초라하지만 기숙사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기숙사에 들어갈 성적이 안 되었는데 이것도 선생님의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다. 1학년은 숙소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잤고, 2학년과 3학년은 도서관처럼 마련된 곳에서 40명 가까운 인원이 공부를 했고, 더러는 잠도 거기서 잤다. 몇 명은 숙소에 와서 잤지만 집이 가까운 사람은 자기 집에서 잤다. 지금은 기숙사에 3학년만 있다고 들었다. 그 때의 기숙사 친구들은 매우 친하다. 기숙사 옆에는 테니스장이 있다. 하나밖에 없는 테니스 코트는 선생님들 차지였기에, 선생님들께서 테니스를 치지 않을 때면 우리가 테니스를 쳤다. 난 그때부터 조금씩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고, 지금도 좋아하는 스포츠 중의 하나이다.
2학년 음악시간엔 기타를 배웠다. 난 창조적인 활동을 좋아한다. 시도 몇 편 지어보기도 했고, 기타를 이용해 작곡도 했다. 누군가 망가뜨리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많은 자작곡이 있을 것인데 안타까운 일이다.
고등학교에서도 수학경시대회엔 몇 번 나갔다.
2학년 때, 제3회 한국수학올림피아드(KMO: 대한 수학회 주최)대회에 나가게 되었다. 덜 배운 부분도 시험범위였지만 그리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어차피 못 푸니까). 친구와 둘이서 안동대까지 가서 시험을 치르고 왔다. 나중에 내게 동상을 받으러 여의도광장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다. 토요일이었는데 선생님은 같이 가 주질 않으신다고 했다. 나는 꼭 가보고 싶었지만 혼자선 가기가 싫었다. 사실은 서울까지 갈 줄도 몰랐다. 결국 한 달이 지나니 학교로 상이 배달되어 왔다. 상장과 메달을 보고 교장 선생님도 기뻤는지 그 덕에 학교로부터 장학금을 또 받았다.
3학년 때, 포항공대 주최 제5회 수학학력경시대회에도 나갔다. 학교에 포스터가 붙어 있는 걸 봤는데 선생님께서 권유하셔서 즐거운 마음으로 가게 되었다. 친구와 둘이서 포항까지 가서 이틀 동안 시험도 치고, 기념품도 받고, 차비도 받고, 관광도 하고 잘 놀았다. 무엇보다 돈 몇 백원을 주웠던 것(터미널과 강의실에서)이 재밌는 에피소드였다. 둘째날 시험을 치르고 그 날 시상식까지 했는데, 나는 장려상을 받았다. 전국에서 180명이 왔는데, 약 10%가 상을 받았다. 컴퓨터를 타려는 야심을 가지고 갔었지만 공학용 계산기에 만족해야 했다.

드디어 내게도 대학 입시라는 관문이 다가왔다.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았으므로 결정하는데 그리 어려운 것은 없었다. 네 가지의 철칙이 있었다면 이런 것이었다.

1. 국립대(전기)에 간다.
2. 수학과를 간다.
3. 집에서 너무 멀지 않은 곳으로 간다.
4. 안전하게 하향 지원한다.
요즘은 여러군데 지원해도 된다고 한다. 아뭏든 나는 위 네 가지 조건을 잘 만족시키는
금오공대 응용수학과에 오게 되었고 앞으로의 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5. 대학교(현역)

여기선 대학교 1, 2학년 생활을 말한다.
현역 시절에 테니스도 많이 쳤고 컴퓨터도 많이 즐겼다.
1학년 땐 기숙사에서 계속 생활을 했다. 동아리(유네스코 학생회) 활동을 1년 동안은 열심히 했지만 2학년 때 탈퇴를 했다. 2학년 1학기 때만 친구와 자취를 했고 방학때부턴 다시 기숙사에 들어갔다. 1학기엔 다른 동아리(거북선 신화)에 가입하여 총무도 봤지만 열심히 하지 못 해서 스스로 한 학기만 하고 나왔다. 안동(및 예천) 향우회의 총무도 했다.

6. 군대 생활

군생활은 참 모범적으로 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배웠다.
진정한 군인정신과 참다운 군의 멋을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입대를 했거나 앞둔 후배들에게도 이것을 찾기 위해 열심히 군생활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자세한 군생활은 보안상 생략한다.

7. 대학교(예비역)

여기선 대학교 3, 4학년 생활을 말한다.
군 전역후 집에서 부모님의 일을 거들거나 놀거나 하면서 쉬다가 3학년 2학기에 역학기로 복학했다. 복학하고 아무 사고없이 학교에 잘 다녔다. 이 때, 테니스에서 족구로 주종목(?)을 바꾸게 된다. 족구계의 황제가 되기 위해 열심히 운동했다. 족구가 좋아서 그냥 열심히 했다. 졸업은 97년 8월에 했는데 졸업식은 이듬해 2월에 했다.
97년 6월에 취업을 했는데 첫직장은 MEK Engineering이다.
8개월 가량 근무했다. 엔지니어로서의 자질에 대해 많이 고민했다.

8. 미래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는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많은 걱정이 있겠지만 많은 조언자들의 도움이 있기에 즐거운 고민으로 살 것이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았는가? 무엇이 되기 위해 살 것인가?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든 떳떳하게만 산다면 늘 행복한 나날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꿈꾸지만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듯 현재와 미래에만 몰두하기 보다 과거의 추억도 가끔씩 되돌아 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


최초 작성 : 1996년